해가 지고 나면 바다는 생각보다 빨리 낯설어집니다.

낮에는 선명하던 방파제 끝, 물길의 폭, 멀리 보이던 섬의 윤곽이 어둠 속으로 밀려납니다. 그때 선장이 붙잡을 수 있는 기준 중 하나가 불빛입니다. 등대의 불빛, 등부표의 불빛, 다른 배의 항해등이 밤바다의 언어가 됩니다.

그런데 불빛을 그냥 “빨간불 하나 보인다” 정도로만 보면 부족합니다. 해도에는 그 불빛이 어떤 색인지, 어떤 리듬으로 깜박이는지, 몇 초마다 반복되는지가 짧은 약어로 적혀 있습니다. 이 짧은 약어를 읽을 수 있어야 화면 속 해도와 실제 바다가 서로 맞아떨어집니다.

이번 글은 등대와 부이의 등화등질을 해도에서 어떻게 읽는지 정리한 글입니다. 제부도항과 전곡항 주변처럼 서해 연안에서 자주 만나는 항로표지를 떠올리며 읽으면 훨씬 쉽습니다. 특히 제부도 요트투어 중 선셋투어처럼 일몰 뒤 입항하는 코스에서는, 이 짧은 약어가 실제 운항 판단과 바로 연결됩니다.

다만 항로표지의 실제 등질, 등고, 광달거리는 개정될 수 있습니다. 아래의 Fl R 4s 같은 표기는 읽는 법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이며, 출항 전에는 반드시 최신 전자해도, 등대표, 항행경보를 확인해야 합니다.

등화와 등질

먼저 두 단어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등화는 불빛 자체입니다. 홍색인지, 녹색인지, 백색인지처럼 눈에 보이는 빛의 색과 존재를 말합니다.

등질은 그 불빛의 성격입니다. 계속 켜져 있는지, 짧게 번쩍이는지, 두 번씩 묶어서 깜박이는지, 몇 초마다 같은 패턴이 돌아오는지를 말합니다.

해도에는 이 정보가 아주 짧게 표시됩니다.

Fl R 4s

처음 보면 암호 같지만, 나누어 보면 간단합니다.

표기읽는 법
FlFlashing짧게 번쩍이고 어둠이 이어지는 섬광
RRed홍색 등화
4s4 seconds한 패턴이 4초마다 반복

Fl R 4s홍색 섬광이 4초 주기로 반복되는 등질입니다.

여기서 4초는 “4초 동안 켜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번 번쩍이고, 어두워졌다가, 다음 번쩍임이 돌아오기까지의 전체 반복 시간이 4초라는 뜻입니다.

전자해도에서는 이렇게 봅니다

요즘은 종이 해도보다 전자해도나 차트플로터 화면을 먼저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면을 확대하면 항로표지 기호가 보이고, 표지를 선택하면 이름, 위치, 등질, 등고, 광달거리 같은 정보가 함께 표시됩니다.

해가 진 뒤 제부도 앞바다에서 선장이 요트 선미 조타석 주변을 확인하며 야간 운항을 준비하는 모습

제부도 선셋투어 후에는 바다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시간부터는 해도, 수심, 항로표지, 등질 확인이 더 중요해집니다.

제부도항으로 들어온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전자해도에서 방파제 끝 항로표지를 확인했는데, 그 표지 설명에 Fl R 4s 같은 등질이 적혀 있다면 머릿속에서는 이렇게 풀어야 합니다.

  • 저 표지는 홍색으로 보여야 한다.
  • 계속 켜진 불이 아니라 짧게 번쩍이는 불이어야 한다.
  • 그 번쩍임은 4초마다 돌아와야 한다.
  • 내가 실제로 보고 있는 불빛의 색과 리듬이 해도 정보와 맞아야 한다.

밤바다에서는 항구 불빛, 차량 불빛, 낚싯배 작업등, 양식장 불빛이 한꺼번에 들어옵니다. 밝다고 다 항로표지는 아닙니다. 해도에 있고, 위치가 맞고, 색과 리듬이 맞는 불빛을 찾아야 합니다.

아래 화면은 제부도항 방파제 쪽 항로표지를 선택한 예입니다. 전자해도 화면에는 FL R 4S 8M AIS처럼 표시되어 있습니다.

전자해도에서 제부도항 방파제 항로표지를 선택하자 FL R 4S 8M AIS 정보가 표시된 화면

제부도항 방파제 항로표지 예시입니다. FL R 4S 8M AIS는 홍색 섬광, 4초 주기, 광달거리 8해리, AIS 항로표지 정보를 뜻합니다.

누에섬 쪽 등대는 또 다른 리듬으로 표시됩니다.

전자해도에서 누에섬 등대를 선택하자 FL(2) W 6S 8M 정보가 표시된 화면

누에섬 등대 예시입니다. FL(2) W 6S 8M은 백색 2섬광, 6초 주기, 광달거리 8해리로 읽습니다.

제부도 선셋투어에서 더 중요한 이유

제부도 요트투어, 특히 선셋투어는 일몰을 보고 난 뒤 입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낮에 출항했더라도 돌아오는 시간에는 제부도항 방파제와 항로표지를 불빛으로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제부도 근처에는 저수심 구간도 상당히 많습니다. 특히 세일요트는 킬 때문에 드라프트가 약 2미터 가까이 되는 경우가 많아, 야간에는 수심과 항로표지를 더 조심해서 봐야 합니다. 낮에는 눈에 들어오던 얕은 구간과 방파제의 형태가, 해가 진 뒤에는 전자해도와 등질 확인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하게 됩니다.

마이요트는 약 20년의 항해 경험을 바탕으로 제부도 선셋투어 손님들을 더 안전하게 모시기 위해 물때, 시정, 바람, 저수심 구간, 항로표지 상태를 매번 다시 확인합니다. 같은 코스라도 해가 지면 전혀 다른 항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등질은 시험용 지식이 아닙니다. 손님을 태우고 어두워진 항구로 돌아올 때, 선장이 실제로 확인해야 하는 기본 언어입니다. 제부도 선셋투어의 분위기는 일몰에서 만들어지지만, 안전한 투어의 마무리는 야간 입항 준비에서 결정됩니다.

한국 연안은 IALA B 구역입니다

부이와 항로표지를 볼 때는 IALA 부표식을 함께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일본, 미국과 같은 IALA B 구역입니다.

항구로 들어가는 방향, 즉 바다에서 항으로 들어오는 방향을 기준으로 보면 기본은 이렇게 잡습니다.

  • 우현 쪽 표지: 홍색
  • 좌현 쪽 표지: 녹색

영어권에서는 “Red Right Returning"이라고 외웁니다. 들어올 때 빨간 표지를 오른쪽에 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문장만 외우면 위험합니다. 실제로는 먼저 해도에서 “어느 방향이 들어오는 방향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물길이 갈라지는 곳, 작은 항로가 붙는 곳, 방파제 안쪽에서는 감으로 색을 맞추면 안 됩니다.

자주 보이는 등질 약어

해도에는 여러 등질 약어가 나오지만, 요트 운항자가 먼저 익혀야 할 것은 아래 정도입니다.

약어이름실제로 보이는 느낌
FFixed계속 켜져 있는 불
FlFlashing짧게 번쩍이고 어둠이 더 긴 불
LFlLong Flashing비교적 길게 번쩍이는 섬광
OcOcculting켜져 있다가 잠깐 꺼지는 불
IsoIsophase켜짐과 꺼짐 시간이 거의 같은 불
QQuick빠르게 깜박이는 불
VQVery Quick매우 빠르게 깜박이는 불
Mo(A)Morse A짧고 길게, 모스부호 A 리듬
AlAlternating색이 번갈아 바뀌는 불

초보자가 가장 헷갈리는 것은 Fl, Oc, Iso입니다.

Fl은 어둠 속에서 짧게 번쩍이는 느낌입니다. 꺼져 있는 시간이 더 깁니다.

Oc는 반대입니다. 불이 켜져 있다가 잠깐 가려지는 느낌입니다. 켜져 있는 시간이 더 깁니다.

Iso는 켜짐과 꺼짐이 거의 같은 길이입니다. 켜졌다 꺼졌다가 균형 있게 반복됩니다.

이 차이를 알고 보면 해도 표기가 훨씬 덜 딱딱해집니다. 알파벳 몇 글자가 아니라, 실제 밤바다에서 보일 불빛의 리듬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색, 높이, 거리도 같이 읽습니다

등질 약어에는 색이 함께 붙습니다.

약어
WWhite백색
RRed홍색
GGreen녹색
YYellow황색
BuBlue청색, 일반 항로표지에서는 드묾

예를 들어 Q G는 빠르게 깜박이는 녹색 등화입니다. Iso W 6s는 백색 불빛이 켜짐과 꺼짐을 거의 같은 길이로 반복하고, 그 전체 주기가 6초라는 뜻입니다.

등대나 등부표 설명에는 여기에 높이와 광달거리가 붙기도 합니다. 여기서 대문자와 소문자 구분이 중요합니다.

Fl R 4s 8m 5M

이 표기는 보통 이렇게 읽습니다.

표기의미
Fl R 4s홍색 섬광, 4초 주기
8m등고, 기준면 위 불빛 높이 8미터
5M명목 광달거리 5해리

소문자 m은 미터입니다. 등대의 불빛이 기준면 위로 얼마나 높은지, 즉 등고를 나타낼 때 씁니다.

대문자 M은 해리(nautical mile)입니다. 불빛이 어느 정도 거리까지 보이도록 설계되었는지, 즉 명목 광달거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8m 5M은 “높이 8미터, 광달거리 5해리"입니다. 반대로 제부도항 방파제 화면처럼 FL R 4S 8M으로 표시되어 있다면, 여기의 8M은 높이가 아니라 광달거리 8해리입니다. 누에섬 화면의 FL(2) W 6S 8M도 마찬가지로 광달거리 8해리입니다.

전자해도 앱에 따라 등고와 광달거리를 모두 보여주기도 하고, 광달거리만 간단히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m인지 M인지 눈으로 한 번 더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AIS와 RACON 표시는 따로 봅니다

항로표지 설명 끝에 AIS가 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해당 등대나 등부표가 AIS 항로표지(AIS AtoN) 정보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 표지에 AIS 송신기가 달려 있을 수도 있고, 육상 기지국에서 그 표지의 위치 정보를 대신 송신하는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해도나 차트 앱에서는 항로표지 기호 옆에 AIS 글자가 붙거나, 선택했을 때 원형 강조 표시와 함께 AIS 정보가 나타나는 식으로 보입니다. 다만 회색 원이나 하이라이트는 앱에서 “지금 이 표지를 선택했다"는 표시일 수도 있으니, 원 하나만 보고 AIS 장비가 달렸다고 단정하면 안 됩니다. 표지 정보창에 AIS가 있는지 함께 봐야 합니다.

RACON은 레이더 비콘입니다. 레이더 전파를 받으면 정해진 모스 신호를 되돌려 보내서, 레이더 화면에서 그 표지의 방향과 거리를 확인하기 쉽게 해 줍니다. 해도에는 보통 항로표지 근처에 Racon 또는 Racon과 모스 문자 정보가 함께 표시됩니다. 전자해도에서는 표지 주변에 원형 표식이나 별도 아이콘, 문자 정보로 보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표기보는 장비의미
AISAIS 수신기, 전자해도항로표지 위치와 정보를 AIS 데이터로 확인
RACON레이더, 전자해도레이더 화면에 모스 신호 형태로 응답하는 표지

AIS와 RACON은 등질 자체가 아닙니다. 불빛의 색과 리듬은 Fl R 4s 같은 등질로 읽고, AIS나 RACON은 그 표지를 전자장비로 더 확실하게 확인하게 해 주는 보조 정보로 봐야 합니다.

부이는 색보다 역할을 먼저 봅니다

부이는 등대보다 낮고, 파도와 조류에 흔들리며, 배경 불빛에 묻히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부이를 볼 때는 색만 보지 말고 역할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제부도와 전곡항 주변처럼 조류가 있고 얕은 구간이 많은 곳에서는 항로 가장자리, 위험물, 공사구역, 어장 표시가 한 화면에 함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세일요트는 드라프트 때문에 같은 수심이라도 모터보트보다 여유가 적을 수 있으니, 항로표지를 보는 일은 수심을 읽는 일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 항로 좌우를 알려주는 측방표지
  • 고립장애물을 알려주는 고립장애표지
  • 안전수역이나 항로 중심을 알려주는 안전수역표지
  • 공사, 계측, 양식장 등을 알리는 특수표지

각 표지는 색, 모양, 두표, 등질이 함께 의미를 만듭니다. 낮에는 모양과 색을 같이 보지만, 밤에는 결국 등질의 비중이 커집니다.

예를 들어 고립장애표지는 백색 2섬광, 즉 Fl(2) W 계열로 식별합니다. 안전수역표지는 백색 등화에 Iso, Oc, LFl 10s, Mo(A) 같은 등질이 쓰입니다. 특수표지는 보통 황색 계열입니다.

이 기본을 알고 있으면 전자해도 화면의 작은 기호 하나도 다르게 보입니다. “저기 부표가 있네"가 아니라 “저 표지는 어떤 역할을 하는 표지구나” 하고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 입항 때 확인하는 순서

야간에 제부도항으로 접근한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부도 주변은 조석에 따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물길의 느낌이 달라지고, 저수심 구간이 많아 세일요트는 특히 여유수심을 보수적으로 잡아야 합니다.

먼저 전자해도에서 항로와 항로표지를 확대합니다. 목표로 삼을 표지의 이름, 위치, 등질을 확인합니다. Fl R 4s라면 빨간색으로 4초마다 번쩍이는 표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다음 눈으로 실제 바다를 봅니다. 한두 번 깜박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적어도 몇 주기는 지켜봅니다. 4초 주기라면 12초 정도는 봐야 리듬이 맞는지 감이 옵니다.

그리고 내 위치와 방위를 다시 맞춥니다. GPS 위치, 콤파스 방위, 실제 표지 방위가 서로 말이 되는지 봅니다. 하나라도 어색하면 바로 속도를 줄이고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변 불빛을 분리해서 봅니다. 육상 가로등, 차량 불빛, 낚싯배 작업등은 항로표지가 아닙니다. 특히 밝은 작업등은 눈을 쉽게 빼앗습니다. 밝은 불빛보다 중요한 것은 해도와 맞는 불빛입니다.

대충 맞는 것 같다는 위험합니다

등질 약어를 외우는 이유는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밤에 “내가 보고 있는 저 불빛이 정말 해도에 표시된 그 표지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해도에 Fl R 4s라고 적혀 있는데 실제로 보고 있는 불빛이 녹색이거나, 계속 켜져 있거나, 1초마다 빠르게 깜박인다면 그건 같은 표지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내 위치를 잘못 잡았거나, 다른 불빛을 보고 있거나, 해도 정보를 최신으로 확인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바다에서 “대충 맞는 것 같다"는 말은 위험합니다.

항로표지는 선장이 해도와 실제 바다를 연결하는 기준점입니다. 작은 요트라도 이 기준점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작은 배일수록 조류와 바람에 더 민감하고, 세일요트는 드라프트까지 고려해야 하니 기준점 확인이 더 중요합니다.

출항 전 체크리스트

야간 운항이나 일몰 전후 운항이 있다면 출항 전에 이 정도는 확인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 목적 항로 주변 등대와 등부표의 이름, 위치, 등질을 확인합니다.
  • 제부도항 주변 저수심 구간과 내 배의 드라프트를 함께 확인합니다.
  • 홍색, 녹색, 백색, 황색 표지가 각각 어떤 역할인지 해도에서 확인합니다.
  • Fl, Q, Iso, Oc처럼 헷갈리기 쉬운 등질은 미리 뜻을 풀어 둡니다.
  • 최신 전자해도, 등대표, 항행경보를 확인합니다.
  • 현장에서 표지 리듬이 맞지 않으면 속도를 줄이고 위치를 다시 확인합니다.

요트 운항은 좋은 장비를 달았다고 저절로 안전해지지 않습니다. 장비가 보여주는 정보를 사람이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등대와 부이의 등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짧은 약어 하나를 읽을 줄 알면 밤바다의 불빛은 훨씬 덜 막연해집니다.

제부도 앞바다도 매번 같은 바다가 아닙니다. 물때가 바뀌고, 시정이 바뀌고, 조류가 바뀌고, 주변 어선 움직임이 바뀝니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봅니다.

해도를 보고, 표지를 보고, 불빛의 리듬을 봅니다.

그게 선장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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